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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01/04 미륵의 꿈을 가진 천불천탑의 계곡-운주사
- 2009/03/10 분단의 상징, 속초 '아바이 마을'을 가다.
미륵(彌勒). 석가모니 이후에 세상에 나타나 석가모니가 구제하지 못한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래의 부처... 도솔천에서 수행설법중인 미륵보살이 나타나기를 염원한 중생들의 염원이 만들어 낸 천불천탑의 전설... 누워있는 거대한 돌미륵이 일어서면 세상이 바뀐다는 민중의 염원이 끝내 사그라든 슬픈 피안의 땅... 천불천탑. 전남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 천불산에 있는 운주사를 표현하는 말이다.
세월의 무던함이런가? 천불천탑은 이제 80기의 석불과 17기의 석탑으로 남아 ‘천불천탑’을 증거한다.
1481년에 발행된 <동국여지승람>에는 ‘운주사라는 사찰이 있었으나 사라지고 천불천탑만이 남아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현재는 석불 80기와 석탑 17기가 남아있지만) 1942년까지만 해도 석불 213기와 석탑 30기가 존재했다고 한다. 불교가 중흥했던 고려시대 이전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어느 누구에 의해서 어떻게 건립되었는지 또한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분명한 것은 미륵신앙이 민중에 회자된다는 것은 그만큼 그 시대가 살기 어렵다는 반증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쟁패를 하던 삼국시대가 그러했고 당나라와 연합한 신라에 의해 이루어진 통일신라가 그러했고 후삼국 시대가 그러했다. 전쟁이 많다는 것은 억울한 죽음이 많다는 것이다. 그 수많은 억울한 죽음과 피폐해진 민중이 기댈 곳은 미륵뿐이었으리라.
천불천탑을 세우고 와불이 일어서는 그날을 꿈꾸던 한 많은 민초들은 어찌되었을까? 역사는 세상이 뒤집힌 것을 알려주지 않는다. 민중이 일어서고 천년의 태평성대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폐허가 되어버린 운주사는 증거하고 있다.
기존 질서와는 다른 불탑과 석탑 양식, 칠성바위와 같은 샤머니즘적 요소와 이름난 석공의 솜씨가 아닌 평범한 농부가 만든 것 같은 소박한 고졸미, 북두칠성의 별자리 위치와 밝기를 원형의 바위크기로 정확히 표현한 칠성바위, 뒤죽박죽인 시대별 양식의 혼재, 어느것 하나 정확히 알려지지 않은 수수께끼의 공간이 운주사이다. 선암사 주지스님이셨던 지허스님께서는 “‘기존질서’가 세운 곳이 아니다. ‘땡추’들이 세웠으리라. 파격이다.”라고 지난달 만남에서 귀뜸하셨다. ('땡추'라는 표현은 운주사를 창건한 세력에 대한 비하의 뜻이 아니라 기존 기득권 세력이 아니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
폐사지 같은 운주사가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총칼로 국민을 죽이고 정권을 탈취한 정치군인들이 득세한 1980년 6월, 이곳이 문화재보호지역으로 지정되고 황석영의 소설 장길산의 마무리 무대가 이곳 운주사로 설정되고 난 이후부터이다.
격변의 80년 6월에 문화재보호지역 설정이라? 일하는 공무원들은 어느 시대에나 있겠으나, 정치군인들이 민중의 염원을 구현할 미륵불을 보호하려했을까?
암울했던 시대에 전라도 지역 지식인들은 권력의 눈을 피해 이곳 운주사에서 시대의 아픔을 토해내었고 피로 물든 80년 5월을 보낸 이후 권력자의 시선이 이곳을 주목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라 추측한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반만년 역사속에서 미륵의 용화세상은 오지 않았고 수많은 지식인과 민중이 권력의 총칼에 쓰러져 간 독재의 시대인 70~80년대에 문학은 민중의 아픔을 격정적으로 토해내었다. 황석영의 소설 <장길산>이 그러했고 조정래의 <태백산맥>이 그러했다. 황석영은 소설 <장길산>의 마지막 무대를 이곳 운주사로 설정했다.
“세상의 모든 천민이여 모여라. 모여서 천불천탑을 세우자. ”
역사속에서, 소설속에서 권력에 쓰러진 ‘장길산’의 염원이, 민중의 염원이 다시 세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80년 5월을 경험한 민중과 지식인들에게 운주사는 쓰러져 간 역사속의 인물 장길산의 염원, 민중의 염원을 계승해야 할 약속의 땅으로 부활하던 공간이었다.
희망찬 새해가 밝았다. 새 희망과 새 의지로 새롭게 시작한 또 다른 하루이다. 이제는 '민중'이라는 단어의 뉘앙스가 퇴색되어버렸지만 80년대를 경험한 죄인이기에 단단한 부채의식이 존재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민중! 아니, 국민이 힘들어 하는데 그걸 모르는 위정자가 존재한다면 시대를 초월해서 또 다른 형태의 ‘미륵’은 등장한다. 소통하지 않고 군림하는 절대권력은 절대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새해가 밝았으나 북악산 위정자의 판단력은 흐린듯하다. 70년대의 암울했던 권력의 그림자가 스멀거린다. 또다시 부끄러운 80년대를 경험해야 하는가?
운주사가 그립다. 아! 미륵이 그립다.
처음 운주사를 알게 된 것은 80년대 후반 소설 <장길산>을 통해서였지만 마지막 불탑을 세우지 못하고 끝내 좌절해버린 오지 않는 미륵에 대한 실망감이었을까? 머릿속에서 잊혀졌던 아니 각인되지 못했던 천불천탑에 강한 충격을 받았던 것이 1997년 학고재에서 출판된 <미륵-운주사 천불천탑과 용화세계>란 책을 통해서였다. 이 책은 독일 함부르크 미술대학의 교수인 요헨 힐트만이 1985년 한국을 처음 방문한 이래로 한국의 전통문화에 매료되어 발간한 <미륵-한국의 성스러운 돌들>의 한국어 번역본이다. 이 책에서는 지금과 같이 변해버린 운주사가 아니라 논밭으로 사용되던 운주사의 옛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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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단의 상징, 속초 '아바이 마을'을 가다. (0) | 2009/03/10 |
'아바이 마을'은 분단이 상징이다. 이념과 사상이 강조된 혼돈의 역사 속에서 정체성이 강요된 희생양이다. 이곳 청호동은 잠시 거쳐 갈 임시 피난처였다. 그 잠깐의 세월이 그들을 강제했다.
우리는 그들을 실향민이라 부른다. 그들은 스스로를 이북사람이라 부른다. 반 백년의 지난한 세월을 훌쩍 비켜서서 신포사람, 단천사람, 홍원사람을 구분한다. 정체성이 강요된 체제에서 고립된 그들은 힘없고 나약한 '아바이'로 늙었다. 폭 2 백 여 미터, 길이 1 천 8 백 여 미터의 모래밭 위에서 50년 세월이 박제되었다.
분단의 아픔을 가슴으로 녹이고 검게 그을린 육신으로 서슬퍼런 바닷물과 싸워야 했던 아바이들에게 모래밭은 또 다른 아바이들이 나고 자란 탄생의 공간이고 부활의 공간이다. 정체성을 강제한 푸른 바닷길이 모래 위에 집을 짓게 만들고 아이들을 탄생시켰다. 분단의 역사가 곧 그들의 역사이고 실향민의 역사가 곧 그들의 삶의 궤적이다.
'아바이 마을'에 밤이 깊어 간다. 고요하고 아늑한 동해안의 속초 '아바이 마을'
'낯선 이방인'에게 '낯선 땅'은 두려움의 공간이다. 그 공간을 그들은 피와 땀으로 일구고 가꾸었다. 푸른 바닷물이 때로는 공포로, 때로는 아픔으로 그들을 지배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을 먹이고 입혔다. 심연의 바닷물은 그들에게 도전과 기회의 공간이다. 풍부한 물산이 그들을 살찌웠고 그들의 임시거처에 또 다른 이방인을 불러들였다. 전국 각지에서 풍부한 어족자원에 삶을 의탁하고자 찾아 든 사람들은 외딴 동해의 공간을 가득 채웠다.
노인회관에서 만난 어느 늙은 '아바이'는 개들이 오징어를 버리고 지폐를 물고 다녔다는 표현으로 과거의 화려했던 그 시절을 회상했다. '아바이 마을'은 모두에게 타향이다. 그곳은 모래밭이었다.
푸른 빛이 인상적인 속초 '아바이 마을'의 하늘. 사파이어가 이보다 푸를까?
푸른 하늘을 휘돌아 남과 북이 하나된 바닷길을 비행하는 갈매기들의 안식처였고 갈대의 숲이었다. 갈매기가 날던 그 모래밭 위를 사람들이 날아 다녔다. 단단해진 모래밭 위로 비행기가 가라앉고 떠올랐다.
그러나 그 갈매기의 땅은 같은 이방인에게 같은 땅이 아니다. 그들에게 강제된 실향민의 낙인은 그 땅을 영원한 객지로 만들었다. 그들이 만들고 그들이 번영시킨 그 땅은 그들을 외면했다. 남과 북이 만들어낸 실향의 아픔을 더 철저히 각인하고 주입했다. 돌아갈 길이 막혀 돌아가지 못하는 이주민에게 그 땅은 영원한 부재의 땅이다. 생존을 위해 흘러든 남쪽의 이방인에게 그곳은 기회의 땅이다. 그들에게는 실향민이라는 주홍글씨는 없다.
분단의 표현물인 철책선을 배경으로 나이드신 어르신들이 잰걸음으로 바닷가를 거닐고 있다.
그러나 태어나고 자란 곳은 있어도 돌아갈 곳이 막혀버린 '아바이들'에게 그곳은 거대한 댐에 가로막혀 산란이 불가능해진 연어와 같다. 산란의 고통을 경험하지 못하고 죽어가는 어미 연어의 상처 난 몸통과 동해 외딴 곳 어느 늙은 '아바이'는 그래서 닮았다. 서서히 죽어가는 어미 연어의 붉은 산란색과 시뻘겋게 타들어가는 늙은 '아바이'의 수구초심이 또 그렇게 닮았다.
' 아바이 마을' 초입인 청호시장을 지나서 자리잡은 청호초등학교. 미래에 대한 '아바이들'의 피와 땀과 열정이 만들어 낸 숭고한 공간이다. 모래밭 위에 연탄재를 등짐으로 날라서 만들어낸 이곳에서 아바이들의 미래가 자라났다.
건너편에 자리잡은 청호노인회관에서 만난 늙은 아바이들은 이곳 청호초등학교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아바이들을 따라서 내려 온 소년이 이곳을 거쳐서 그들의 아바이처럼 나이가 들었다. 그 소년의 아들, 딸이 입학을 했거니 안했거니 의견이 분분한 것 자체가 이곳에 대한 아바이들의 자부심의 표현이다.
마을회관에서 고향을 그리워하시는 실향민 할아버지. 이곳 '아바이 마을'을 만드신 분들 중 한 분이다.
남다른 자부심에 얼굴이 펴진 아바이들의 얼굴이 햇볕정책과 대북지원에 대한 이야기에 곧바로 얼굴이 일그러러진다. 날카로운 함경도의 쇳소리가 귀청을 울린다.
"젊은 것들이 전쟁을 알아?"
"공산당을 알아? "
그리고 김일성 부자에 대해서, 6.25 전쟁 때의 공산당의 소행에 대해서 분개한다. 그들은 아직도 전쟁중이다. 그들의 적개심의 근원은 깊고 깊다. 저 심연의 끝이 동해바닷물과 닮았다. 우리가 평화와 통일을 이야기하고 북한 동포의 인권을 이야기하고 미래를 이야기할 때 그들은 과거를 이야기하고 과거 때문에 아파하고 과거에 사로잡혀 산다.
분단의 풍경. 50년 세월이 박제된 동해안의 철책.
새삼 두렵다. 그러나 그 과거에 대한 집착을 만든 것은 그들이 아니라 '우리들'이다. 남북이산가족상봉 서류를 신청하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고통의 선택이다. 공산당이 싫어서 남한으로 내려 온 이유 때문에 북한에 두고 온 가족이 피해를 입을까 봐서 망설이다 포기하고 마는 것이 아바이들이다.
그리움으로 한걸음에 내달려 가슴 가득 내 핏줄의 뜨거운 체온을 나누고 싶지만 체제는 그들을 돌고 돌아 머나먼 중국 땅을 통해 한가닥 희망의 끈을 놓게 한다. 브로커를 통해서 소식을 받아보지만 50년 이별의 갈증을 해소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나마 노동력을 상실한 늙고 힘없는 아바이에게 경제력은 중국행을 가로막는 또 다른 장벽이다.
어느 TV프로그램을 통해서 금강산을 다녀온 아바이들에게서 차창을 통해 바라 본 왜소하고 남루한 북녘 동포에 대한 연민과 북한 체제에 대한 반감이 교차되어 나온다. 감정적인 발언이 대부분이다.아바이들에게 중.장기적이고 전략적인 대북 정책은 단 한명이라도 살아서 이산가족 상봉을 해보고 싶다는 소박함에 묻혀버린다.
그들에게 중,장기적인 접근은 애초에 무리일 지 모른다. 겪어 온 분단 50년의 역사에 비해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너무나 짧다. 그들이 강요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그들을 잊어버리고 살았다. 아니 애초에 존재하는 지 몰랐다. 그들을 이방인으로, 실향민으로 각인하고 그들의 아바이 순대와 가자미 식혜에 함몰되어 그들의 처연한 슬픈 가슴을 인식하지 못한 것은 아닌가? 그들은 우리에게 어느 순간 극복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정갈한 맛에 감동받은 '아바이 마을'의 '아바이 순대', 넉넉한 인심에 감사드립니다.
'아바이 순대'는 이북에 대한 향수이다. 그러나 청호동의 아바이순대는 분단이 만들어 낸 산물이다. 함경도 토속 음식인 '아바이 순대'는 피난처에서 돼지 창자를 구할 수가 없어서 흔한 오징어를 이용하여 만들어 판 것이 지금의 '아바이 순대'가 되었다.
드라마 가을동화가 몰고 온 광풍에 어촌의 풍경이 관광지로 탈바꿈하고 있다. 관광이라는 돈벌이가 아바이들은 달갑지가 않다. 식당을 하는 몇몇의 주민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변화가 없다. 그러나 그 여파는 충격적이다. 관광산업 발전을 위해서 아바이 마을 전체가 현대화되어야 한다. 한때 가슴을 들뜨게 만들었던 현대화가 아바이들의 가슴을 서글픔과 회환으로 물들인다.
이른 아침에 반갑게 인사를 나누어 주시던 마을 아주머니. 행복하세요.
아바이 마을의 추억은 짧은 거리를 오가는 갯배에서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갯배가 왕래하는 그 짧은 거리 속에 우리와 그들의 먼 거리가 숨어 있다. 그들이 살아 온 삶의 터전은 그들의 소유가 아니다. 대부분이 항만청과 국가의 소유이다.
그들이 만들고 그들이 지켜온 아바이 마을이 그들을 내몰고 있다. 늙은 아바이들에게 남은 것은 고향에 대한 분단 50년의 그리움과 모래밭 위에 만들고 지켜온 또 다른 고향을 그리워해야 할 숙명이다.
아바이의 정체성은 수구초심이 뼈에 사무쳐 잠시 은거할 실향민 공동음택지를 동해안 곳곳에 마련해두는 대비책으로 나타났다. 동해 외딴 곳, 바닷가의 모래밭은 이제 더 이상 아바이 마을이 아닐 지 모른다. 그들이 밟고 그들의 터전을 올린 그 모래 또한 수만 년 전, 한때는 단단한 바위였다. 그 단단한 바위가 세월의 무게에 한 줌 모래로 흩어졌다.
청호 초등학교에서 만난 '아바이 3세' 어린이들. 이들이 '아바이들'의 미래이다.
분단 50년의 고통과 비극을 검푸른 파도와 싸우며 그 모래밭 위에 쌓아 온 함경도 '아바이'의 속초 청호동 아바이 마을 또한 투박한 세월 속에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검푸른 동해의 바람결에 날아 든 비릿한 갯내음이 묘한 긴장감을 일으킨다. 붉게 물든 청호동 아바이 마을 위로 한바탕 푸른 소낙비가 떨어질 것 같다.
2005. 7월 어느날. 속초 아바이 마을에서.
아바이 마을 속칭 아바이 마을은 8.15 광복 후에 북한 지역이었다가 수복되어 속초리 오구(五區)가 되었다. 1.4후퇴 당시에 국군과 함께 남하한 함경도 일대의 피난민들이 휴전 후에 고향으로 돌아갈 길이 없게 되자, 휴전 후에 고향으로 돌아갈 길이 없게 되자, 휴전선에서 가까운 허허벌판 모래밭에 집을 짓고 집단촌락을 형성하였는데 피난민들 중에 늙은이들이 많아서 함경도 사투리인 아바이라는 말을 써서 오늘날의 아바이 마을이 되었다. 1966년 속초시에서 동제(洞制)가 실시됨에 따라 주변 청초호의 이름을 따서 청호동이 되었다. 청초호는 둘레 약 5Km, 넓이 약1.3Km이었으나 지금은 개발로 인하여 많은 부분이 육지로 바뀌었다. 조선시대에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양양의 낙산사 대신에 이곳 청초호를 관동팔경의 하나로 소개할 정도로 경관이 뛰어난 곳이었으나 도시의 발달로 인하여 그 옛날의 청초호를 알길이 없다. 1990년대 말까지는 오징어잡이같은 어업이 대부분이었으나 드라마 가을동화이후에 밀려오는 관광객을 상대로 한 주민들이 늘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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